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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 토요일에 제75회 어문회 한자 1급 시험에 응시하였다. 한자 공부에는 마약 같은 매력이 있어서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오래오래 꾹꾹 누르다 결국 접수를 해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약 10년 전에도 어문회 한자 2급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2급과 1급 사이에 시간의 간극이 상당하다. 앞으로 특급II와 특급을 획득하는 시간은 이보다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가족과 함께 한자 시험을 치는 걸로...

 

나의 생업은 한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과학이다.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서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은 한자 공부가 시간 낭비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한자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는 내 나름대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아무리 한글이 우수하고 한자 단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하는 작업이 진행된다고 해도 한자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동음이의어가 있다. 한글 표기는 같지만 뜻이 다른 단어를 의미하는데 이 뜻을 드러내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한자다. 둘째, 창의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창의력이란 결국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별하는 데에서 출발하는데, 공부하다보면 전혀 다른 곳에서 쓰이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같은 한자를 공유하는 단어가 있음을 알게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하는 때가 있다. 또한, 한자 하나도 뜻이 여러 개로 나뉘는데 이런 뜻과 뜻 사이에서도 몇 가지 통찰을 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10개 정도 되는 한자 자격증 업체에서도 한국어문회를 고른 이유도 몇 가지가 있다. 모든 문제의 답을 주관식으로 써야 한다는 점, 특히 한자 쓰기로 나오는 문제의 단어들이 실생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장단음을 문제로 낸다는 것도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이다. 블로그에 쓰는 글은 생각나는대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때문에 글이 잘 다듬어지지 않아 읽는 데에 그리 매끄럽지 않지만, 제대로 글을 쓰려면 읽을 때의 리듬감을 무시할 수 없다. 비록 장단음은 실생활에서는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것 같지만 장단음을 안 상태에서 글을 소리내어 읽다 보면 오묘한 매력이 있다. 또한, 또 다른 동음이의어 구별법이 되기도 한다. 다만 실망스러운 것은 연구하는 학자나 단체마다 장단음 규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다보면 어째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세력 형성이라고나 할까.

 

이제부터 75회 시험 후기다. 어문회 1급은 사실 국한 혼용문 초급 수준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보니 예전에는 시험에 정말 국한 혼용문이 나오는데 이 경우 시험이 응시자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곤 한다. 내가 항상 감사드리는 과거의 응시자(시험의 명맥을 유지시켜 주시기도 하고, 문제가 이상하면 적극적으로 항의도 해주신다는 점에서)들께서 꾸준히 노력해주신 덕택에 요새는 시험 난이도가 과거에 비해 많이 낮아지고, 변칙도 적은 편인 것 같다.

 

1급은 총 200문제이고, 한 문제 당 1점씩이며 16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다. 이번에 나는 (가채점이라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10개 조금 넘게 틀린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채점위원들께서 내 필체를 이상하게 보신다면 더 많이 틀릴 수도 있다!

 

1번부터 50번 까지는 한자어의 독음을 묻는 문제였다. 과거에는 종종 음이 두 개인 한자가 섞여서 나온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 없이 평이하게 나왔다. (독음 총 50문제)

 

51번부터 82번 까지는 한자의 훈음을 적는 문제였다. 1급 응시자들이 틀릴 만한 부분이 오히려 2급 이하의 한자들인데 대부분 1급 한자에서 출제되어 평이했다. (훈음 총 32문제)

 

83번부터 92번까지는 첫음을 길게 읽어야 하는 한자어를 고르는 문제였다. 사실 앞에서 장단음에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고 감히 적었지만 공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이건 정말 장음을 표시하면서 평소에 글을 읽어야 그나마 흥미를 붙이고 공부할 수 있다. 이번 문제는 기출 문제나 문제집에서 답이었던 단어를 암기해 두었다면 크게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단음 총 10문제)

 

93번에서 132번까지는 밑줄 친 단어의 한자를 쓰는 문제였다. 역시 기출문제를 충실히 복습했다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120번 난발(爛發)과 128번 서설(瑞雪)이 생소했다. (한자 쓰기 총 40문제)

 

133번부터 142번까지는 한 글자만 제시된 2음절 단어에 제시된 한자와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를 넣어 완성시키는 문제였다. 135번 노획(虜獲)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했는데 결국 틀렸다. 사로잡을 로(虜)의 유의자로 얻을 획(獲)을 채워야 했는데 얻을 획에 붙잡다 또는 포로의 뜻이 있음을 이번 시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136번 서리(胥吏)도 기출 빈도가 낮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서(胥)의 유의자로 벼슬아치/관리 리(吏)를 써야 했다. 답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큰 무리는 없었지만 서로 서에서 다른 뜻으로 아전을 새기고 있다는 것을 이번 시험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라는 뜻을 새기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동의어 (유의어) 총 10문제)

 

143번부터 152번까지는 반의어 관련 문제였다. 여기서는 146번 '숙질(叔姪)'과 149번 '용이(容易)의 반대말'을 채우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아재비 숙(叔)의 반대자로 조카 질(姪)을 써야 했는데 도저히 조카 질 자는 떠오르지 않아서 맏 백(伯)을 썼다. 숙부와 백부를 떠올리며 숙백(叔伯)이라는 단어를 완성했는데 사전을 찾아 보니 형과 아우, 형제의 유의어로 나왔다. 정답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반면, 149번은 용이(容易)의 반대로 난해(難解)가 떠오르지 않아 복잡(複雜)을 썼다. 분명 기출 문제에 나왔었을텐데 떠오르지 않아 아쉬웠다. 사전을 보고 생각을 해봐도 뉘앙스가 아무래도 다른 것 같다. 그래도 궁금하니 게시판에 질문을 해봐야겠다. (반의어 (상대어) 총 10문제)

 

153번부터 162번까지는 동음이의어를 쓰는 문제였다. 153번 원수(元帥, 군인의 가장 높은 계급)와 158번 패도(覇道, 인의를 무시하고 권모술수로 공리를 취함)을 틀렸다. 153번은 元帥를 元首로 써버렸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내가 쓴 한자어는 국가 원수할 때 쓸 수 있는 단어란다. 158번은 답을 확인하고는 놀랐다. 悖道나 敗道 중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覇道였다니... (동음이의어 총 10문제)

 

163번부터 177번까지는 사자성어를 완성하는 문제였다. 171번 滄海桑田과 175번 橘化爲枳에서 잠깐 멈칫했으나 떠올라서 쓸 수 있었다. 다만, 171번에서 큰바다 창(滄)대신 푸를 벽(碧)을 썼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무리없이 정답으로 인정될 것 같다. 나머지는 이미 출제가 된 적이 있었다. (완성형(성어) 총 15문제)

 

178번부터 187번까지는 한자의 부수를 쓰는 문제였다.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던 것 같다. (부수 총 10문제)

 

188번부터 190번까지는 주어진 한자의 약자를 쓰는 문제였다. 빈출 문제라 크게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약자 총 3문제)

 

191번부터 200번까지는 한자어의 뜻을 쓰는 문제였다. 채점이 관대하게 진행된다는 정보를 접하기도 했지만 공부하기가 번거로워서 가장 소홀히 한 부분이었다. 여기서 10개 다 틀릴 것을 각오하고 나머지를 열심히 하자 해서 압박감이 조금 있기도 했다. 이 부분은 채점 결과가 공개 되면 나의 답안도 기억을 떠올려 다음 글에서 적어 보겠다. (뜻풀이 총 10문제)

 

이상이 제75회 어문회 한자 1급 후기이다. 시험을 치른 많은 사람들이 기출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는 했는데 이번 시험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점수가 예상과 비슷하게 나오면 다음 글을 통해 내가 공부했던 방법과 내가 만들었던 자료들을 공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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